-
18-19세기 영국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사이언스&히스토리 2020. 4. 16. 17:33
미국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유럽의 중심국가중 하나인
영국이란 나라는 대지면적이 작은 나라이지만
많은 전쟁과 문화의 발달을 이루어
유럽의 발전이나 미국의 생성에 큰 영향을 준
모태의 나라이다
1707년 연합법의 공표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연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성립되던 당시에 웨일스는
이미 1535년 웨일스 법에 의해 잉글랜드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아일랜드 역시 1536년 잉글랜드에 의해
다시 정복되어 아일랜드 왕국의 군주를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가 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만이 별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1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 제임스2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면서
두 왕국이 한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임스2세의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전제 정치는
결국 영국 의회의 반발을 가져왔다.
1688년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메리공주의 남편이었던
오렌지공 윌리엄이 영국 의회의 지원을 받아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 후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스튜어느 왕가의 본향인
스코틀랜드와 가톨릭 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에서는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요구하는 재커바이트의 발란이 발생하였다
1688년과 1745년에 두 차례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1746년 완전히 진압당하였다.
1756년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 서인도 제도의
여러 나라와 식민지가 참여한 최초의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1763년 파리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인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영국은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건설을 지속하게 된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미국의 독립으로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게 되었으나,
아프리카와 아시아지역에 대한 식민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1770년 제임스쿡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였으며
그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71년 무굴제국으로부터 인도에서의 통상권을 획득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아시아 지역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세 차례의 카르나티크의 전쟁 의 결과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인도는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803년 경 영국은 인도의 거의 전역을 식민 통치하였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대량 생산을 위한
공장의 건설이 이루어지는 등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석탄 철강 방직과 같은 새로운 산업은
영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1765년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을 발명하였으며
이후 대량생산이 도입되어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리카르도
애덤스미스와 같은 많은 고전경제학 학자들이
경제학 이론의 기초를 닦았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은 엔클로져운동에 의한
농민 계층의 몰락과 불결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는 빈민층의 확대,
아동노동 공해와 같은 여러가지 문제도 함께 가져왔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과 같이 기계를 파괴하는
과격한 노동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유니온 잭의 형성, 잉글랜드 기와
스코틀랜드기를 합한 유니온 잭에 아일랜드 기가
합쳐져 지금의 영국 국기가 되었다.
연합왕국으로서 영국의 두 번째 단계는
1800년 연합법을 통해 1801년 1월 1일 부터 아일랜드 왕국을
연합왕국의 일부로서 합병한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되었으며,
이후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까지 이 체제가 지속되었다.
아일랜드 왕국의 합병은 1170년 노르만 왕조이래
지속되어 온 잉글랜드 왕의 아일랜드 침공 및 정복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노르만 왕조의 정복 후 잉글랜드의 왕은 아일랜드를 통치하였으며,
새로운 연합왕국이 된 영국의 국왕 역시 이미 17세기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개신교 교도를 얼스터 지역에 이주시켰다.
이들 개신교도들은 아일랜드 주민의 로마 카톨릭 신앙뿐 아니라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와 적잖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1800년 연합법에 의한 아일랜드 합병은 정치,
법률적으로도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 지방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1641년 아일랜드 봉기이후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아일랜드 의회에 대한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였다.
아일랜드의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개신교 이주민들은
종종 개신교 패권주의로 불렸다.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가톨릭 교도에 대한
정치 참여의 금지는 지속되었으며 영국 성공회의 신자가 아닌
이른바 "비국교도" 전체로 정치 참여 금지가 확대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이러한 조치에 맞서
아일랜드 단결 협회등을 만들어 저항하였으며
결국 1798년 아일랜드 봉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봉기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에 고무받은 것이었으나
영국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공회 교도만으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의회는 영국과의 합병에 동의하고
영국은 1800년 연합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를 환영하는 아일랜드 주민은 극소수였다.
1806년 11월 21일 프랑스 제국의 통치자였던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선포하고 영국의 무역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후 대륙봉쇄령을 중심으로 한 나폴레옹 전쟁이 발생하자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의 중심국가가 되었고
수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다.
1815년 영국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7년 전쟁 이후 두 번째로
유럽 전역과 세계 각지를 무대로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인
1837년부터 1901년 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세계 곳곳을 자국의 식민지로 점령하여
대영 제국의 절정기를 맞게 된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흔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한편, 1832년 선거법의 개정으로
투표권이 중산층에게까지 확대되었으나
여전히 투표권을 획득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챠티스트 운동이 일어난다.
19세기 영국의 주요 무역 중 하나는
청나라에 대한 아편 판매였으며,
아편 금수 조치를 단행한 청나라와
두차례에 걸친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아편 전쟁의 결과 영국은 청나라와 난징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98년 홍콩을 포함한 신지에를 99년간 할양받게 된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중국에 반환되었다.
영국은 작은나라이지만 인도나 아일랜드등
주변나라를 식민지화 하는등 많은 전쟁으로 세력을 넓히는
정책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왔다
인접한 나라 프랑스와도 수많은 전쟁으로 영역을 탐하였으나
결국 맘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작지만 많은 경제와 과학등을 발전시키므로서
세계에서 선두에 설수 있는 나라가 된것이다
'사이언스&히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세기 영국의 역사는? (2) 2020.04.17 현대로 오는 러시아 역사는?~ (0) 2020.04.16 고대 중세의 러시아 역사를 알아보자~ (0) 2020.04.16 중국의 황하문명에 대해 ~ (0) 2020.03.27 중국의 장강문명에 대해 알아보자~ (0) 2020.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