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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세의 러시아 역사를 알아보자~사이언스&히스토리 2020. 4. 16. 10:19
현대에 미국과 중국을 이어 대륙의 크기와 자원으로
견재할수 있는 나라중 하나는 러시아 일것이다
소련에서 러시아로 정치가 바뀌면서
미국과 각축을 벌이며 발전해 오고있는 러시아는
우리나라와도 매우 밀접한 나라이다
동슬라브족이 거주하기 전 남러시아 쪽에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과
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트인이 각각 남러시아에 진출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남러시아에 들어왔지만,
7세기부터는 동유럽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동, 서, 남의 많은 여러 슬라브 원주민들 중
동슬라브족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 민족들의 지배를 받고
튀르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슬라브인들은 5세기부터 투르크 민족 국가인
사바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후에는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나중에는
동슬라브족 루스인의 초기 국가인 루스 카간국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자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있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인 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카간국이라는 튀르크의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중앙아시아 튀르크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족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족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족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동슬라브족은 튀르크족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튀르크족의 동슬라브족지배에 의한
투르크화의 영향력으로 동슬라브족 문화는 서유럽 문화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됐었다.
현재의 러시아와 벨라루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동슬라브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대 동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삼림 지대에서 소박한 농경 생활을 보내고 있던
동슬라브족의 서쪽에는 발트어파에 속한 발트족
동쪽이나 북쪽에는 핀우 그리아어파에 속한
핀족들이 그들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남쪽의 흑해 북해안의 스텝은 유목화된 동슬라브족들이 거주했다.
이윽고 이 지역의 동슬라브족들은
튀르크인들의 지배로 투르크어족에 동화되었고,
돌궐의 대제국이 붕괴한 다음은 볼가 강의 하류에서
튀르크족의 정복에 의해 하자르 한국에 정복당하였다.
서유럽에서 프랑크왕국등 게르만족의 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노르드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 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해 북해의 교역에 종사한
노르드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슬라브족 사람들은
노르드인과 튀르크 하자르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원형인 키예프루스는
862년 바랑기아인 출신의 류리크가 교역도시 노브고로드의 공이 되었고
류리크의 일족이 동슬라브족의 거주지역으로 지배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몇 개의 나라들이 생겨나면서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나라들이 있던 이 지역은 류리크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스로 불리게 되고,
후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원이 된다.
루스인은 10세기까지 투르크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62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한 루스인들이
페르시아 사서와 동,서 로마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에 원초연대기의 기록에서는 루스인들의 분파로 알려진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하면서 키예프 대공국의 전신인
노브고로드 공국이 나타나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대공이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된다.
현재 러시아 영토는 루스인들의 초기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북동부 지방이었다.
이 중세 국가의 수도는 키예프였다.
키예프 공국과 류리크 왕조는 현재의
스웨덴 영토에서 온 바랑기아인들이 세웠으며
이들은 동슬라브인 들에게 흡수되었다.
키예프 대공국은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였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대공국은 13세기 류리크 왕조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다.
키예프 대공국이 붕괴된 이후 노르로고드 공화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라쟌공국 트베리 공국 모스크바 공국 등의
군소 루스 공국들이 키예프 루스의 명맥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동시에 타다르의 멍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킵차크 칸국의 칸인 바투의 서양 원정 이후,
루스인들은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당시 루스인들은 킵차크 칸국을 '황금의 약탈자'라는 뜻의
골든 호르드(Golden Horde)라고 불렀다.
킵차크 칸국은 기존 루스인 지배자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간접 통치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킵차크 칸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루스인들의 반란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인 1380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처음으로 킵차크 군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이후 토크타미시칸의 반격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타격을 입어
다시 킵차크 칸국의 지배하에 놓였기 때문에
루스인들의 완전한 독립은 1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모스크바는 1147년에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대공인
유리돌고 루키의 치세에 처음 이름을 드러냈으며,
이후 류리크 왕조 출신인 알렌산드르 네프스키의 막내아들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의 치세에
모스크바 대공국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2세기의 지배가 지나 1317년에 의 대공은
킵차크 칸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킵챠크 칸국으로부터
전 루스인의 대공으로 인정받는다.
이 때부터 세력은 강해지면서 트베리 공국과 같은
다른 루스 공국들과의 투쟁,
폴란드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같은
서쪽의 외국 세력과의 전쟁 속에서
모스크바는 점차 킵챠크와 루스 전체의
통합을 이루는 도시로 인정받게 된다.
타타르의 멍애는 계속되었으나 타타르의 귀족과 루스귀족의 결혼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으며 타타르인들은 문화적•언어적으로 슬라브화되어
킵차크칸국은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은 이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당시 킵차크칸국 으로부터 대공으로 인정받은
트베리 공국의 미하일과 싸워 이겼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1380년에는 미하일이 죽은 복수를 위해 출격한
킵차크 군을 돈 강에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1382년에 토크타미시칸에게 패배하여
다시 모스크바를 점령당한다.
이후에도 킵차크 칸국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슬라브화된 킵차크 칸국은 서서히 쇠퇴하면서
이반 3세때 모스크바 대공국은 완전히 독립한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루스인의 새로운 중심국 적인 모습에서 성장해
러시아인의 국가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여타의 나라들이 그렇듯 러시아는 넓은 대륙으로 인해
많은 전쟁으로 다변화를 이루면서 국가라는것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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