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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그리스 문명 알아보기 2편
    사이언스&히스토리 2020. 3. 19. 14:31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문명은 현시대에서도 항상

    기리고 되새겨 지고 있는 문명이다

    그만큼 많은 다양한 학문과 과학의 발달이

    유럽문화권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이후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8세기까지

    시대를 그리스 암흑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1차 문헌 사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고고학 유적과 유물만 남아있을 뿐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서술',

    디오도로스 시켈레이우스(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역사집

    히에로 니무스의 크로니콘(Chronicon) 등 2차 3차 사료는

    이 시기의 짤막한 연대기와 임금의 목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일컫고 있다.

     

    그리스의 상고기란 어떤지 알아보면

    그리스는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여 여름은 덥고 건조하나

    겨울은 다소 따뜻하고 비가 내린다.

    여름에는 전혀 비가 내리지않는 환경 때문에 항상 물 부족이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후 덕택에 그리스 일대는 포도와 올리브가 가장 중요한 농산품이었으며

    소규모의 목축을 수반한 다각적인 농업경영이

    지중해 일대의 농업 특색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각 골짜기나 평지가 하나의 지리적 단위를 이룬다.

    이러한 지리 조건이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들어선 주된 요인이다.

    이러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자연 환경이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이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포도주 올리브와 공산품은 매우 중요한 물자였다.

     

     

    폴리스 성립의 배경을 알아보면

    도리스인이 남하했을 때 미케네 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도리스인의 침략으로 일부 그리스 사람들은

    에게 해의 섬과 소아시아방면으로 이주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이주한 소아시아 해안지대와 인접한 섬들을 이오니아라고 하였는데,

    미케네 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있던 이오니아는

    오리엔트 문화와도 접촉하기 쉬워서

    폴리스도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서 먼저 성립하였다.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는 암흑시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미케네의 선형 비문자가 잊혀진 이래 문자가 없었으나,

    그리스는 페키니아문자를 도입하고

    이를 수정하여 그리스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9세기경부터 문자 기록이 등장하게 된다.

     

    미케네 사회가 붕괴된 뒤 그리스 본토에는

    서너 부족으로 이루어진 소왕국이 여기저기 나타났으며,

    현실적인 생활 단위는 개별 가족으로 구성된 촌락 공동체였다.

    그리스의 지형 때문에 각 자치 공동체는 바다나 산맥에 따라

    이웃과 단절되어 각 섬과 계곡, 평야에 각자 독자적인 취락을 이루었다.

    정치는 왕정이었으나 임금의 권력은 미약하였으며

    토지 소유에서도 미케네와 달리 공유지와 이에 따른 공동체적 규제가 없고,

    촌락공동체의 성원은 저마다 클레로스(κλήρος, 분배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였다.

     

    도리스인이 남하하여 혼란이 일어난 데다,

    다른 나라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ㆍ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었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형성하였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고 있다.

    대체로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도 많다. 그렇기는 하나 여러 촌락의 중심시로의 집주로

    폴리스가 성립한 게 전형이라 하겠으며,

    따라서 이를 도시 국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폴리스의 중심이 되는 도시는

    대체로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하였으며,

    도시는 폴리스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이었다.

    도시 안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세워진

    아크로폴리스(ἀκρόπολις)가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아고라(αγορά)라는 광장이 있다.

    이곳은 시장인 동시에 정치를 포함한

    모든 공공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이자 사교의 장이기도 하였다.

     

    렐란토스 전쟁(기원전 710년경 ~ 650년경)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기록에 남은 오랜 전쟁이었다.

    이 싸움은 유력한 폴리스(도시 국가)인 칼키스와 에레트리아가

    에우보이아의 비옥한 렐란토스 평야를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명목상 칼키스가 승자이긴 하나,

    오랜 전쟁으로 두 도시 모두 쇠퇴하였다.

    폴리스가 성립할 당시 중심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주로 귀족과 수공업자 또는 상인들이었으며,

    농민은 촌락에 머물었고 귀족들도

    그 근거지를 농촌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 성립 이전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파괴되는 일이 없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시민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노예와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자유인과 외국인(metic)도 완전한 의미의 시민은 아니었고,

    오직 폴리스를 형성하는 데 참여한 부족의 성원 내지 그 후손만이 완전한 시민이었다.

     

    즉 폴리스는 종교적ㆍ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따라 규제되며,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 공동체로 볼 수 있다.

    폴리스는 고전기에는 본토에만 200개가 넘었고,

    소아시아에서 에게 해와 지중해 일대에 건설된 식민시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었으나 각 도시의 그 넓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폴리스가 성립한 기원전 8세기에는 호메로스 시대의 왕들은 사라지거나,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존재가 돼버렸고

    정치 권력은 귀족에게 넘어갔다.

    촌락을 단위로 하는 부족적인 성격이 강한 임정에서

    실권을 빼앗은 귀족들이 편의상 중심 도시로 집주하였다.

    이것을 폴리스의 성립과 귀족 정치를 연관시키려는 견해도 있다.

     

    귀족은 평민보다 많은 토지와 가축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혈통과 가계가 뛰어나거나 빼어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폴리스 방위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시대에는 중무장을 한 1대1의 전투 방식이 있었다.

    말의 사육이나 중무장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를 부담할 수 있는 귀족이 폴리스 방위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즉 그들은 신이나 영웅,

    또는 왕의 후예들임을 자랑하는 가장 유력한 씨족들의 출신인 것이다.

     

    평민 중에는 약간의 수공업자와 상인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대다수는 분배지를 소유한 중ㆍ소농민이었다.

    "일과 나날"을 쓴 헤시오도스가

    귀족의 부정한 재판 등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폴리스의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적인 성격과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영 농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아테나이,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바이등

    여러 도시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각 폴리스는 주변 농촌 지역과 소읍을 장악하였으며,

    또 아테나이와 코린토스는 주요 해운ㆍ상업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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